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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섬 :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이간 이성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계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은 삶을 연명을 해야하는 구체적인 까닭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죽음을 피해서라는 것이 원초적인 이유인 것 같고, 대개 80세 이상 살아간다는 결과가 있으니 우리는 남은 50년 이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을 해봐야겠다.

 

바이첸바움은 유대인이다.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태어나 미국으로 넘어가게된다. 아마 그는 어릴적 시절 자신의 유대인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죽음에 대한 것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 내용은 책의 그의 생애에 잘 나타나있다. 그는 후에 이성의 섬라고 불리는 개념을 찾게 된다. 선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 선한 경험을 겪은 사람들을 모은 곳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사용할 컴퓨터에 대한 기술들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이건 나치와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에 좌절을 한다.

 

그는 후에 엘리자라는 프로그램을 발명한다. 우리 생활관에 있는 기가지니’, ‘시리등의 인공지능의 선조격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엘리자를 간단히 보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 할 수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계인간, 휴머노이드 말이다. 이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사람을 대신해서 기계가 이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바이첸바움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왜 그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얘기했지만 산다는 것의 명답은 없다고 본다. 살아가면서 왕도가 있으면 우리는 그 길만 따라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독립적인 피조물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한 길만 찾게 된다면 우리라는 단어가 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를 존중해주는 것을 내포한다고 본다. 왕도만 쫓아 간다면 이 세계는 하나가 될 것이다. 독립되지 못하고 균일화된 마치 나치의 세계와 같이 말이다. 그 역시 엘리자를 통해 느낀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실, 규칙,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습이나 행동들을 입력한다고 한다. 그런데 입력시키는 내용들이 과연 정말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를 들이밀어 만들게 된다면 그 것은 인공지능이 아닌 허수아비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하게 될 경우에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잣대를 가지고 대화를 할 것이다. 이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바이첸바움은 말한다.

 

인공지능은 피동적이다. 입력되고, 학습되고 배워지고 익혀진다. 능동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그저 입력된 결과를 출력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역시 타인의 삶에 의해 생각이 바뀌게 되고 비교하고 이를 통해 경험을 얻게된다. 하지만 인공지능과의 차이는 우리는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배워온 것들을 통해 를 만들어 나간다. 나라는 존재를 형성해가고 독립적이고 스스로 서 있는 그 자체를 만들어 나간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이런 것 같다. 우리는 만들어지지 않은 라는 성을 짓는다. 하지만 이 성은 완성되지 못한다. 이 성의 설계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렇게, 아닌 것 같으면 다시 조금 수정해서 지어 나간다. 언젠가 성이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삶의 목표를 찾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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