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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2019.03.27

그건 모두 잘못된 것이었어요. 당신이 인생의 수단으로 삼으며 추구했던, 그리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당신의 눈을 가리고 당신이 삶과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짓이자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고요.”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젊다고 생각하면 젊은 나는 지금 바로 죽지 않을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그런데, 군대에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좌절과 힘듦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생각했었다.괴로웠다. 휴가를 나가도, 어디를 가던지 간에 나는 불행했었다. 군대에서는 일만 하는 머저리 같은 존재였고, 밖에 나가면 나는 어느 누구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1’인 것 같았다. 많은 좌절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목적을 잃은 채 나는 아무 책이나 고르고 읽게 되었다. 그 중 하이데거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서 담담히, 천천히 나에게 말을 해준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결국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라며. 나는 여태껏 죽음에 대해서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은 아직 내 가까지 있지 않지만, 나에게 올 숙명이고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결국 죽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목적이 결국은 살기 위해서였다.우리가 먹고, 입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싫어하는 행동들 모두 말이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어떠한 특정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프 니콜레예비치 톨스토이는 이 책을 노년에 쓰게 된다. 톨스토이 단편선에서와 같이 톨스토이는 중년기를 지나면서 다양한 생각들을 한 것 같다. 노년기에 자신도 죽음이란 것이 두려워서 이반 일리치와 자신과 치환시킨 게 아닐까 하는 정도로, 이 사람이 노망이 났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톨스토이도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고, 돌아보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첫 장에 이반 일리치가 죽기 직전, 다른 동료들의 시점으로 시작을 하게 된다. 이반일리치가 죽었다는 것을 시작으로, 주위의 동료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한다. 그의 재산이 어떠했는지, 같은 동료 직장들은 자신의 직책이 얼마나 올라갈지에 대한 계산적인 생각들은 기본이었다. 그의 아내 역시 같은 동료에게 따로 불러내어 자신의 남편의 죽음으로 얼마의 돈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을 한다. 마지막은 그와 함께 했던 카드게임을 동료들이 다시 하러 떠나는 모습으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거대하지 않았다. 흡사 내 옆에 일어난 누군가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은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는 조금은 위로라는 겉치레로 그를 생각을 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것에 집중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첫 장도 사람의 이기심과 무관심, 자신은 아직 죽지 않는다라는 점을 표현했던 것 같다. 그의 동료들은 자신은 아직 죽지 않는다라는 자위를 하며 그의 죽음을 넘긴다.

그 다음 장부터는 이반 일리치의 생을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는 그렇게 특별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남들과 평범하게 돈을 벌고, 취업을 하고, 자신이 더 큰 집으로, 더 큰 행복을 찾으며 살아간다. 카드게임을 낙으로 삼으며 살아간 그는, 특별하다면 특별한 사건을 겪는다. 사다리에서 넘어져 어느 한쪽을 다치게 된다. 처음에는 이 충격이 그에게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인도시키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한 순간이겠지 하며 넘어가버린다. 하지만, 서서히 죽음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그는 서서히 아프기 시작한다. 의사는 그의 병이 어디가 아픈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다. 이반 일리치는 이제 모든 것들이 짜증 나고 불평을 하게 된다. 아픈 자신을 두고 공연을 보러가는 아내와 딸이 밉고, 자신의 병을 완전히 치유한다며 오는 의사들이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이 아픈건 둘째치고 주위의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하면서 말이다.

죽음이 서서히 그의 옆에 다가가자, 그는 이제 체념과 좌절, 모든것들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것들,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는 천천히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게 의미가 있었는지 생각을 한다.

이게 뭘까? 나는 정말 죽는 걸까?” 그가 물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정말이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거지?”라고 물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그런거야. 별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가 받은 충격 때문에 생긴 병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 병은 죽음을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더 가까이 데려왔을 뿐이다. 죽음은 별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그런것이다. 우리는 결국 죽는 것이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그에게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안에 꼭 박혀서 그를 괴롭히며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양쪽에서, 이어서 열 방향 그리고 사방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가족들이 불쌍했고, 가족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 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가족들을 해방시키고, 자기 자신도 해방되어야했다. ‘, 얼마나 좋아, 그리고 얼마나 간단해.’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통증은?’ 그는 의아했다. ‘어디로 갔지? 어이, 이봐, 통증, 어디에 있나?’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 여기 있었군, 하지만 그게 뭐? 있을테면 있으라지, .’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에 있지?’

그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머물러 친숙해진 죽음의 공포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무슨 죽음? 죽음이 사라진 지금, 공포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공포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죽음은 생이 끝나는 것이기에, 우리가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한계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떠나게 한다는 부정적인 공포가 우리를 두렵게 하기 때문에 죽음을 어렵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것을 인정을 하게된다면, 이반 일리치가 생각을 한 것처럼 죽음이 빛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거대하지 않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결국 우리의 죽음을 대변한다. 우리는 결국 죽는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이란 것을 느끼게 한 책이다. 종교는 이 세계에서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것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죽음을 잘 표현해준다. 그것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싶다. 죽음을 어느 것으로 포장을 하지 않고, 담담히 죽음을 표현한 것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양한 생각을 한다. 나는 살아가야하는 목적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살아감에있어서 특정한 목적이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결국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갈 때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되겠지만,죽음 앞에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연약한 존재가 된다. 우리가 목적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을 담담히 인정을 하면서 살아가면 어떨까.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우리는 그저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다. 죽음 대신 빛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