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2019.04.02

두려움은 종교적 독단의 기반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사회에서,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서 있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에 가면 의지할 사람이 있거든,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다. 남에게 의지하고 기댄다. 나의 고민과 힘들었던 점들을 누군가에게 풀었을 때, 그 사람은 그럼 그걸 받아줄 마음의 공간이 있을까?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털면 그 사람 역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털게 된다, 자신의 짐은 덤으로. 쌓이고 쌓인 폭탄처럼 터질 것 같은 짐은 누구에게 풀어야 하는가. 결국 하나님께 푸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단순히 감정을 푸는 해우소로 취급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이런 연유에 교회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된다.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짐들을 다 짊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했듯, 우리의 죄를 다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지셨듯. 우리의 죄와 고민들을 푸는 것 때문에 가는 것에 대해 뭐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사람의 마음은 다 개인적이기 때문에. 나는 밖에서나 여기에서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서 지키려고 노력한다.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내가 알아서 풀려고 노력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내가 너무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걸 남에게 풀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 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너무 일편적으로 생각을 하는 세상이다. 남에게 배려를 해준다고 하지만, 그건 남을 배려 해주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배려를 받는 것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정치적, 과학적으로 기독교를 비판을 한다. 종교의 가식적인 행위들. (), 종교탄압, , 모든 것들 말이다. 이건 맹목적인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라 생각한다. 인간은 본능적이다. 게다가 이기적이다. 죄와 정의라는 기준도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성이라는 것이 죄악이고 우리가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종교탄압은 더 심하다. 자신이 믿고있는 신이 진리요, 절대라는 기준을 가지고 다른 종교를 핍박을 할 뿐이다. 러셀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들은 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본능적인 마음에 파생된 결과이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는 종교를 믿기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의 삶에 대해 다른 철학자들은 무기력한 사랑이라고 비판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하면서 줏대를 가진다고 말을 한다. 무기력한 사랑이 과연 무기력한 것일까? 니체에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항상 힘이 넘치면서 살아왔던 적이 있는가? 힘이 넘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한 것인데, 당신은 남을 이기면서 사는 삶이 맞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옳다고 하면 예수는 이 세상에 존재를 해야 한다.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짐들을 다 짊어지고 남에게 지는 삶이 사랑이다. ?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끝까지 타인만을 생각하고 하늘로 승천한다. 두번째로 러셀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죄는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예수가 죄와 정의를 왜 구분했는지 아는가? 내가 왜 예수가 줏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무엇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한 길로 만드는지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역시 예수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당신이 느끼기에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 과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왜 사탄이 예수를 유혹할 때 어떤 것을 유혹했는지 아는가. 예수만을 드높이는 것들에 대해서 유혹을 했다. 만약 사탄이 예수에게 세상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줬다면 따랐겠지. 그럼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탄이 아닌 천사가 되었을 것이다. , 사실 사탄은 원래 천사였다.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어 사탄이 된 것이지.

 

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하고싶다. 하지만, 예수가 살아왔던 삶과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변호를 하고싶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기독교는 변해야 한다. 하지만, 변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지금의 기독교는 기업으로 취급 받고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예수는 믿고 싶다. 예수의 삶을 따르고 싶다. 그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이 나에게 무기력하다고 해도 비하해도, 그 사람이 조금 더 후련하고 풀린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남이 행복하길 바라는 편이기 때문이다.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엔도 슈사쿠 - 침묵  (0) 2020.04.08
이성의 섬 :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이간 이성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0) 2019.06.01
이반 일리치의 죽음  (0) 2019.04.10
톨스토이 단편선  (0) 2019.04.01
동백꽃 外  (0) 2019.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