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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동백꽃 外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끝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결말이 있는 소설은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볼 때나, 소설을 읽을 때에나 읽다가 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끝을 본 사람들은 없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매듭이 지어진 소설을 보면 무언가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만화를 볼 때나, 시리즈가 있는 영화를 보면 결말이 있으면 아쉬워지듯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단순했다. 첫번째로는 단편선이였다. 장편소설을 읽기에는 아직 부족한 나에게는 단편선이 읽기 더 수월할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였다. 돌아다니는 일이 많은 나에게 한 곳에서 꾸준히 앉을 수 없어서 짧은 시간에 한번씩 읽을 수 있기 편한 책이였다. 책의 크기가 작아서 어디서든지 읽기 편할 것 같은건 덤이다. 두번째로는 김유정이였다. 문학을 접한 시기는 삼수할 때였다. 그 이후에는 내 삶에 대한 책들을 찾아 떠났었다. 그러다가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 내가 지금껏 읽어왔었던 문학들이 정말 문학이였을까. 문학을 대하는 방법을 달리하고싶었다. 순수히 읽고싶었었다.


김유정 소설은 암울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은 잘 몰랐었지만, 그 시대에서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이야기가 슬펐다. 특히, 소낙비에 나오는 춘호 처의 삶이 너무 슬펐다. ‘세상에 귀한 것은 자기 아내!’ 라고 말하던 춘호가 2원을 벌기 위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고 몸을 팔게하는 모습이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았다. 춘호의 삶을 긍정하지는 않다. 아내 볼을 때리고 노름을 하기 위해 아내를 팔아 넘기는 모습이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 춘호도, 춘호 처도 돈을 벌어 새 옷과 신을 신어 서울에 가서 놀고싶다는 얘기를 할 때, 행복해지려고 사람이 얼마나 처절하면 그런 생각을 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삶이 행복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유정 소설은 결말이 없어서 좋았다. 소설속의 한 사람의 생의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아니라, 어떠한 부분을 보여주고 내가 그에 대한 삶을 한번 생각해보는, 결말을 안보여줘서 좋았던 것 같다. 소낙비나, 동백꽃이나 이 책에 수록된 단편선들 전체들이 조금 더 내가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많이 알고있는 동백꽃의 경우에도 쌈닭이라는 것을 통해 점순이와 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듯, 어떤 부분을 통해 전체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결말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암울한 시대속에서 해학적인 부분들을 표현했다고 소설가를 평가한다. 나도 긍정한다. 그런데, 언제든지 행복한 시대는 없었다. 행복의 기준은 언제나 자기 기준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시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행복한지도 불행한지도 바뀌지 않을까. 암울했다고 하는 시기에서 순수하게 질투하고 좋아했던 점순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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