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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엔도 슈사쿠 - 침묵

 

 

 

2020. 4. 8.

 

후임이지만 먼저 전역했던 분이 계셨다. 내 나이 즈음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승선하기 전 신부를 할지에 대해 고민도 하셨다고 한다. 내게 적응이 되지않던 군 생활에서 유일하게 미래와 신앙을 함께 얘기를 나누던 분이다. 그 분이 내게 자신의 아버지가 쓰신 시집과 함께 이 책을 주셨다. 이 책을 1월에 받았지만 이제 갈무리 한다. 내게 이 책을 주신 정재형에게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책은 나약하다. 기치치로처럼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곧 성화를 짓밟는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이내 다시 미워하고 시기한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하지만 나 조차도 그에게 기대를 저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질없음에 빠지게되고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한다.

일본에 몰래 들어와 핍박받는 일본인들에게 세례를 하고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로드리고 신부. 그러다 이노우에에게 잡혀 자신때문에 물에 잠겨 죽는 현지인들을 보며 애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고 좌절한다. 자신의 벗 가르페가 수형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들어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노력하는데 지친다. 나 조차 윗집의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리만 들으면 밉고 싫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건지 나도 어릴 때 저렇게 뛰어다니고 그랬을텐데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그에 대해 돌아오는 결과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비참하다. 우리는 고통받는다. 이웃을 사랑하는데 만큼 너무나도 어려운 세상이다. 개인화되고 나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희생적이고 비계산적이다. 

예수님도 그랬을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인류를 구원하고 사랑하러 오신 예수님이 이 나라를 구원하러 오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과연 그래도 사랑하셨을까. 자신은 하나님께 왜 자신을 버리셨냐고 할 만큼 힘드셨는데,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는 누더기처럼 더러운 인간만을 찾아 구하셨다……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아무것도 없는 나약한 자들에게 찾아다니시는 걸 보며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가려한다. 로드리고도 그렇다. 일본에 가서 낮은 자들을 찾아가 기도해주지만 이내 곧 잡힌다. 그에게 더 고통인 것은 자신을 해하지 않고 그 주위의 사람들을 참수하고 굶기고 십자가에 묶어 물에 잠기게 하는 등 온갖 고통을 치른다. 사랑을 전하려 왔는데 사랑때문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하는 방법이 맞는건지 의구심이 생긴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가 걸어다니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고 더럽혀진다. 하나님이라면 저들을 치고 우리를 구원해야하는게 맞을텐데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 짓밟힌다. 로드리고는 페레이라 신부처럼 결국 성화를 밟는다. 기치치로와 마찬가지로 배교자로 낙인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들어주신다. 드라마틱한 구원, 기적을 행하지 않고 옆에 함께 울고 계신다. 그게 사랑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걸 통해 덧없음을 느낄 때가 생긴다. 특히 아끼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슬퍼하고 절망하기도한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맞나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이 어차피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고있다. 그가 가는 길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하기에 우리는 어차피 그런 사람이지 않다.

 

세상을 사랑하는게 덧없는걸 느낀지 오래였지만, 나는 그래도 사랑하려고한다. 그걸로 인해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지 알지만 그래도 다시 한 발자국씩 나아가본다.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나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람이 있으니 나는 이로 만족한다. 나도 연약하고 못난 사람이고 부족하다. 기치치로처럼 매번 배반하고 그러면서 고해성사를 들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치치로 조차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한다. 아무리 사람이, 사랑이 덧없더라도 우리 곁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까.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