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말, 다른 대학교의 독서 토론회에 참여를 한 적이있다. ‘동물 홀로코스트’라는 책을 가지고 토론을 하였는데, 동물들이 사육당하는 방식이 독일의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통해 유태인들을 억압하는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였다. 게다가 동물에 대한 이러한 대우가 인간우월주의와 종에 대한 차별로 인해 생겨난것이였고, 미국의 도축의 산업화(컨베이어벨트, 우생학)와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최대한의 효율성을 이끌어내기위해 지금에까지 도래했다는 내용이였다. 동물에 대한 대우는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옳은것이였지만, 동물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모두 나치와 다름이 없다는 점이 충격적이고, 모순적이였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내 마음속에 의사봉을 3번 내리쳐 정한 ‘옳음’, 즉 ‘의’란 무엇이고, 어떤 기준에 의해 생겨난 것일까? 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인간은 피를 묻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집단 대 집단의 대립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었고, 지금의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구위의 정복자가 된 이유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인간은 인간말고도 모든 생명체들을 억압하고, 철저하게 인간에게 ‘유리하도록’ 짜맞추었다. 선사시대에 목축으로 억압했다면, 현대는 가장 효율적인 Cage로 억압하고있다. 비단 동물뿐만 아니고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시킬 때 항상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인류는 정복 전쟁을 벌이는 데 갖다 붙일 만한 다른 이유가 없을 때에는 늘 ‘신(God)’을 들먹였다. 십자군을 레반트로 보낸 것은 ‘신의 의지’였다. 십자군은 교황의 면죄부를 미리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전쟁의 대가였다. 아무튼 그 모든 잔혹 행위의 궁극적인 동기는 무슬림에게서 땅과 자원을 빼앗아 기독교 왕국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으니까.(지구정복자 8장)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억압할 때 자신들이 죄책감을 가지지않게, 즉 ‘정당화’하기위해 항상 명분을 내세운다.(동물들은 ‘최대한의 효율성’을 위해, 인간은 ‘신’ 혹은 ‘정치적인 이유’등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말하는 자신들의 정당성, 즉 옳음에 대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총 4권의 책들을 읽고 난 뒤 옳음은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바른마음 2장에서는 이성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성은 과학의 영역, 감정은 도덕, 정의, 사랑 등으로 나눌 수가 있다고 한다. 데이비드 흄은 이성은 감정의 하인이며, 감정의 하인이여야 마땅하다는 말을 한다.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결국에는 감정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이성적이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시로 과학적인 것은 감정적인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원자 43p에서 소개한 티코브라헤와 케플러의 이야기를 통해 티코브라헤가 케플러에게 주고 싶다는 감정적인 마음이 없었더라면 케플러가 과연 행성3법칙을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있다. 하지만 이 말고도 과학은 감정적이지 않고 1+1=2라는 식을 설명 할 수 있듯, 이성적이란 것이 전부 감정의 하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른마음 2장에보면 Vmpfc라는 조직이 없는 사람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감정적이고,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도덕적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감정이란 것은 우리의 생각에 주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이에 더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없다. 세계는 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뇌과학 (이케가야 유지 저)이라는 책에서 말하듯 우리가 바라보는 지구와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구는 철저하게 다르다. 우리가 고양이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친밀함의 표시이지만, 고양이에게는 공격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이는 우리의 행동은 철저히 우리 중심적이고, 주관적으로 행해지게 된다. 또한 개에 물린 기억이 있는 나는 “우리집 개는 안 물어요”라며 개 목줄을 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상당히 불쾌해 한다. 이 또한 역시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통해 저 사람이 행동하는 것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다면 인간이 철저히 이기적이고, 주관적이면 부족, 더 나아가 국가가 있을 이유가 없고, 법이라는 것도 무용지물일 것이라는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부족, 국가, 법, 이라는 것 모두 다 이기적인 이유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지구의 정복자를 보면, 선사시대 영장류는 다른 동물들 보다 큰 종들이 많았고,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멸종의 위험을 달고 살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같은 종끼리 함께 겨울을 지내야 했으며, 같이 사냥을 해 살아남았다. 이것이 커지면서 부족이 되었다. 현대에는 사회적 원자 1장을 보면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다 보면 슈퍼마켓의 선반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로 가득 차게 되며, 여기에는 하향식 통제나 중앙 집중적인 계획이 필요하지않다’ 라고 말한다. 또한 이를 ‘자발적인 질서’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를 악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정당하게 얻는 사람들 자신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은 다 자신의 생존, 혹은 자신에게 유리함, 즉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이기적인 것이다.
이기적이란 말이 있다면 이타적이라는 말도 있을 텐데, 이타적이란 말 역시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이기적’ 이타주의(사회적 원자 153p)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이 ‘이타적’ 혹은 호혜적으로 한 행동들의 전략은 철저히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 행동이다. 철저하게 이타적이라는 행동( 먼 나라의 쓰나미 사태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에 기부를 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에는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지기 위한 행동으로도 볼 수 있다.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쓰나미의 원인은 지진 혹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이상 변화인데, 그렇다면 정말로 순수한 의도였으면, 지구온난화 되는 것을 반대하는 행위를 먼저 했어야 할 것이다.
우리 머리속에서는 직관적 판단이 먼저 일어나고, 그런 다음에야 천천히, 때로는 고문과도 같이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바른마음 2장 99p )라고 말한다. 바른마음 1부의 제목이 바른마음은 철저히 이기적이며 전략적이라는 말을 하듯 우리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에는 이기적이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듯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하는 도덕적인 것의 정의는 가치, 미덕 규범, 관습, 정체성, 제도, 첨단기술들이 진화한 심리기제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을 말하고, 이 둘은 도덕적 체계로서 함께 작용하여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거나 규제하며, 나아가 협동적인 사회가 만들 수 있게 한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 국가, 사회라는 것도 결국 사람들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마음들 때문에 서로 죽임을 당하고,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우리가 살면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협동적인 계를 원하였던 것이고, 그를 ‘도덕성’이란 말로 포장해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남이 생각하는 ‘의’를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세포로 구성된 우리 몸의 구성체 중에 세포지만 극히 일부분인 암세포가 몸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사회를 이루는 우리 인간 모두를 다 인정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는지 범위의 정도를 정할 수가 없다. 이 범위를 정하는 것 역시 나만의 주관적인 견해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계이고, 딜레마인 것 같다. 다만, 나의 사견으로는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처럼, 우리 인간 대다수가 서로 죽임을 당하지않고, 피해를 입지않는 정도 내에서 인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류가 지금까지 해왔던 길이고, 그래야 인류가 진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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